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타 제국 (문단 편집) === 확장기, 무굴 제압과 두라니와의 전쟁 === || [[파일:marathilightcavalry1.jpg|width=100%]] || || 마라타 동맹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던 경기병 || 아우랑제브 사망 후에도 마라타와 무굴의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힘의 균형을 마라타 쪽으로 돌려놓은 것은 18세기 전반기 마라타의 세습직 대재상(페슈와)이었던 '''[[바지라오]]'''(바지라오 1세)를 비롯한 걸출한 장군과 관료들이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페슈와의 자리에 오른(1720) 바지라오 1세는 그로부터 20년 동안 마라타의 군대를 이끌고 전역을 계획하면서 마라타의 영토와 영향권을 크게 넓혔다. 바지라오 1세가 노련한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니잠[*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군주]]의 칭호다.] [[카마루딘 칸|아사프 자흐 1세]]를 팔케드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제압한 것을 시작으로, 말와 남부, 분델칸드, [[구자라트]]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을 무렵이 되면 마라타는 어엿한 중북부 인도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강성해진 마라타에 비해 여러 내외 사정으로 약체화된 [[무굴 제국]]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마라타군에 맞섰으나, 1737년의 보팔 전투와 델리 전투에서 바지라오 1세의 군대에 연패하고, 수도 [[델리]] 근교가 마라타군에 약탈당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상실한 채[* 1739년이나 1757년과는 달리 이때는 델리가 점령되진 않았다.] 마라타에 전쟁 배상금과 영토를 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노쇠한 [[무굴 제국]]은 1739년에 [[페르시아]]의 --전투기계-- [[나디르 샤]]가 이끄는 [[아프샤르 왕조]]의 침략군에 의해 [[카르날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도 델리가 점령되어 철저하게 약탈당하는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반대로 마라타는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의 지휘하에 남부와 동부로 세력 확장을 계속했는데, 라구지 본슬레는 1741년의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일단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한 다음[* 이때 마라타가 점령한 [[타밀나두]]의 [[티루치라팔리]]는 1743년 하이데라바드 니잠이 카르나타카 나와브와 연합하여 빼앗았지만, 1746년 마라타가 탈환했다.], 1741 ~ 1751년간 [[벵골]] 나와브의 영토를 6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에서 막대한 양의 연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에서 벵골 측이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아니며, 1747년의 부르드완(Burdwan) 전투처럼 벵골군이 마라타군에 대승을 거둔 적도 있기는 했다. 이때의 벵골 나와브국 역시 벵골, 오디샤, [[비하르]] 지역을 지배하며 경제적, 군사적 역량이 상당한 시점이었다. 벵골 나와브국은 이때 여러 차례 이어진 장기전을 치르고 최종적으로 패배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고(전쟁 과정에서 마라타군이 벵골 나와브국의 민간인을 400,000명 가량 학살하는 등 잔혹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벵골의 약화는 직후 이어진 영국 세력의 침투에 벵골 나와브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요인 중 하나였다. 벵골은 이후 마라타가 재침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국 세력이 진입한 1758년까지 계속해서 마라타에 막대한 연공을 바쳤다.] 이제 마라타 제국과 무굴 제국간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1752년에는 마라타 동맹이 [[아프샤르 왕조]]의 후신인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무굴의 수도 델리를 보호해준다는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무굴 제국은 1748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1차 인도 침공 과정에서 아와드 나와브 [[사프다르 장]]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여 아와드-무굴 연합군은 펀자브에서 두라니군을 물리쳤다.(마누푸르 전투) 동년 사프다르 장이 힌두스탄의 대재상이 되고 [[알라하바드]]를 하사받은 후, 무굴 제국은 사실상 아와드의 보호국과 유사한 위치였다. 사프다르 장은 두라니 및 로힐라족에 대항하기 위해 과거 무굴의 적이었던 마라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여 성공한다. 물론 마라타가 맨입으로 도와준 건 아니고, 두둑한 지원금, 북인도 여러 지역에서의 세금 징수권에 더불어 [[아그라]]와 [[아지메르]]를 받는다.] 그런데 1757년 초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 1748년부터 1767년까지 인도를 7차례나 침공한다. 1757년의 델리 점령은 4차 침공 때 벌어진 일.]가 북인도를 침공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델리 침공 과정에서 무굴을 배신하고 두라니에 붙은 로힐라족[* [[파슈툰족]]의 일파. 마라타는 1751-1752년에 이미 아와드 [[나와브]]의 요청으로 로힐라족의 영지 로힐칸드를 공격하여 로힐라족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이때 마라타-아와드 연합군은 로힐라군을 포위하고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3차로 인도를 침공(1752)하자 일단 후퇴한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이 3차 침공에서, 라호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펀자브]]와 [[물탄]]을 뜯어가 무굴 제국을 존망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장군 나집 웃다울라를 델리의 통치자로 남겨두고 물러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라타는 마침 1757년 초부터 전투를 벌이는 등 두라니와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동년 나집 웃다울라를 공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델리 및 근교를 점령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1750년대 후반 마라타가 두라니 지배하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한다. 바야흐로 마라타가 인도 아대륙의 절반 가량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으로, [[사타바하나 왕조]] 및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필적하는 데칸 기반 왕조의 팽창이었던 것이다. 마라타는 페슈와의 사촌 사다시브라오 바우[* 바지라오의 조카.]의 주도로 1750년대 후반 무굴 대재상이자 실권자인 하이데라바드계의 이마드 울물크[* 아사프 자흐 1세의 손자]와 제휴하면서 혼란스러운 무굴 중앙정계도 좌지우지했다. 이마드 울물크가 내부 알력으로 황제 [[알람기르 2세]]를 암살한 후, 마라타와 이마드 울물크는 합세하여 [[샤 자한 3세]]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재위 1759~1760)하고 수도 델리와 [[아그라]]에 마라타 군대가 진주하기도 한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샤 자한 3세는 금세 마라타와 이마드 울물크에 의해 폐위되고, 암살된 알람기르 2세의 아들이 정당한 황제로서 [[샤 알람 2세]]로 즉위하지만, 새 황제는 이마드 울물크의 전횡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 델리를 떠나 마라타 직할령으로 피신해 마라타에 몸을 의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라타의 기세는 전열을 가다듬은 두라니와의 [[파니파트 전투|제3차 파니파트 전투(1761)]][*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5차 인도 침공 과정에서 발생함]에서 잠시 꺾였다. 두라니측 지휘관으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 나집 웃다울라가, 마라타 측 총지휘관으로는 사다시브라오 바우가 참가하였으며, 두라니 측 병력 약 10만, 마라타 측 병력 약 5만이 뒤섞여 싸운 대전투가 마라타의 대패로 끝난 것이다. 마라타의 패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다울라가 아와드의 이권을 잠식한 마라타에 앙심을 품고 두라니 측에 물자 보급을 지원하는 한편 마라타의 보급을 방해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마라타 기병이 탑승한 말들은 중앙아시아산 말들에 비해 체구가 작고 약했기 때문에 기병전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었다. 마라타 동맹은 패배의 결과로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지역의 종주권을 두라니에 넘기고 더 이상의 북인도 확장을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마라타 측뿐 아니라 두라니 측에도 엄청난 국력 소모를 강요했으므로 두라니는 마라타의 팽창을 억제하는 선에서 더 이상 마라타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델리를 비우고 떠난다.[* 잠깐 [[카불]]로 귀환했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1761년 말 다시 인도로 내려와 펀자브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크교도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데, 오히려 구지란왈라와 시알코트에서 패배하고 시크교도가 두라니 지배 하에 있던 펀자브의 중심 도시 [[라호르]]를 접수하게 된다. 이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6차(1762-1763), 7차(1764-1767) 침공은 펀자브 시크교도와의 전쟁이 주를 이루며, 시크교도는 일시적으로 패배하고 학살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특히 7차 침공 때는 아프간 본국의 반란으로 아흐마드 샤의 본대가 원정 도중 귀환하게 된다) 두라니 세력을 몰아낸다.][* 한편 두라니 측에 붙었던 아와드의 슈자 웃다울라는 1762년 영국과 대립하다 아와드로 피신한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를 보호하면서 무굴 제국의 후견자(사실상)이자 제국 대재상(공식)이 되는데, 1764년 벵골과 연합해 영국과 싸운 북사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약화일로를 걷는다.] 마라타 제국은 일단 물러서고,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바지라오의 손자)의 지휘 하에 다시 북인도에서의 패권을 장악해나가는 약 10년간의 고된 부흥기를 거친다. 이 시기는 마라타 내부의 불화로 시작하는데, 파니파트 전투 직후인 1762년 약해진 마라타의 이권을 노리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 알리 칸과 합세한 마다브라오의 삼촌 라구나트라오가 알레가온 전투에서 페슈와의 군대를 패배시킨다. 그러나 1763년 다시 뭉친 마다브라오와 라구나트라오는 외세 하이데라바드를 락샤부완 전투에서 물리치고, 마라타는 숨고르기에 성공한다. 이후 마라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기존 북인도 점령지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고 내실을 다진다. 1770년대에 접어들면, 웅크리고 있던 마라타가 두라니와 협력했던 로힐라족 세력을 대상으로 정복 활동을 재개한다. 로힐라족의 지도자 나집 웃다울라가 1770년에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나집 웃다울라의 아들 자비타 칸이 로힐라족을 통솔하기 시작했으므로 마라타가 이 타이밍을 노린 것이다. 1771년 마라타 내 [[괄리오르]]의 마하라자인 마하다지 신데는 상징적인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를 대동하고 로힐라족 통치 하에 있던 델리를 수복한다. 나아가 마라타는 마하다지 신데를 필두로 로힐라족 지역인 로힐칸드(앞서 언급된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다울라의 보호 하에 있었다)에 대한 대규모 징벌 원정을 개시하여, 로힐라 세력을 붕괴시키고 1773년 나집 웃다울라가 1740년대에 건설한 상징적인 도시 나지바바드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아와드는 불리해지자 과거의 적이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로힐칸드를 잠시 수복하나, 로힐라족이 보호 명목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1773-1774년 영국과 연합해 로힐칸드를 재침공, 합병해버린다.(제1차 로힐라 전쟁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Rohilla_War|First Rohilla War]]) 이후 아와드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나(아와드 무굴 시대), 결국 1801년 영국 보호 하의 번왕국으로 전락한다. 로힐라족은 나중에 영국 동인도회사와 제1차 로힐라 전쟁의 결과로 창설된 람푸르 나와브직 계승 문제로 분쟁을 겪어 1794년에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 번 더 전쟁을 벌이고 나서는([[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Rohilla_War|Second Rohilla War]]) 완전히 영국 보호 하에 놓인다.] 보통 이 시점을 마라타 부흥이 완수된 시기로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